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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김진아

낡은이 2021. 3. 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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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이가 읽은 기간 : 2021.02.08. ~ 2021.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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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그동안 트위터에서 오며 가며 보아온 이름이고, 여성주의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꽤 유명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2019년에 송은이, 김윤아, 김서형을 모델로 한 스텔라아르투아 비컴 언 아이콘 캠페인의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라는 문구를 쓴 카피라이터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그저 나에게는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 정도로 인식되고 있었다.

 

나는 송은이를 좋아하고, 송은이가 스텔라 모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광고의 모델이 이 시대의 일하는 여성을 대표하는 여성 방송인 3인이라는 것이 흥미로웠을 뿐, 그 카피를 만들어낸 사람이 썼다는 이 책에 대해 다시 회자가 되었을 때에는 한참이 지나서야 '아, 그 티켓?'하고 떠올릴 수 있었다. 

 

 

 

이 책은 내 소장은 아니고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책꽂이에서 발견하고 '이거 빌려가도 되냐?' 하고 쏙 뽑아온 것이다. 친구는 이미 인상 깊은 부분에 줄까지 쳐가며 열심히 다 읽었기에 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이 책을 빌렸다. 그때쯤의 김진아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비위 사건에 의해 다시 치러지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가는 후보로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내 머릿속에 있던 '개인' 김진아와는 또 다른 김진아였다. 사실 초반에 춘보가 너무 웃겨서(이기적인 여자 선거송) 팔로우하고 그들의 행보를 지켜보며 호감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 책을 보자마자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읽을 거라면 선거가 끝나기 전에 읽어야 할 것 같았다. 

 

지금에 와서 내가 김진아라는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포인트를 생각해보면,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성의당 유튜브를 둘러보다가 김진아 대표의 목소리 톤을 듣고 너무나 신뢰감이 생겨버린 일이 있었다. 단순히 목소리가 좋은 게 아니라 그의 타당한 발언에 힘을 실어주는 묵직한 톤이었다. 나는 옳은 생각을 가지는 것도 훌륭하지만 그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김진아라면 여성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으로 제격이다'라고 멋대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가 '좋다더라' 아무리 말해도 쉽게 따라가지 않는 편이라 내가 감정이 동할만한 어떤 계기가 있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여성의 당 대표로 서울시장에 출마한다니 관심이 가지 않을리 없지. 그래서 울프소셜클럽에 직접 가보고, 김진아 후보와 짧지만 대화도 나누어 보았다. 실제로 만난 그는 내가 느꼈던 것보다 훨씬 당당하면서도 부드럽고 강한 인상이었다. 

 

 

 

초반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 작가 소개에 들어가있는 사진이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은 확실했지만! 사진의 배경인 울프소셜클럽은 내 지인들이 모두 가고 싶어 하는 공간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르는 공간이기도 했다. 작가 소개를 읽어도 송은이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목차를 펼쳐들었다. 야망, 여혐, 인맥, 미러링, 정치, 늑대. 소제목만으로 충분히 흥미가 있었다. 딱 흥미까지만 있고 엉덩이 싸움에는 재주가 없는 낡은이는 하루에 한 장씩.. 두장씩... 아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평소에 소리내어 읽는 편이라 속도가 느림)

 

 

 

작가 김진아의 머릿말에 쓰여있는 이름들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그들과 나는 조금의 친분도 없으며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이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가 숨기고자 했던 것들을 드러내 주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아주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안다. 그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이 큰 위험부담에도 스스로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울컥할 일이지. 지인에게 선물 받은 '김지은입니다'를 아직도 프롤로그에서 못 넘기고 있는 나는 파이책도 여기에서 주춤,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나는 감정에 잘 매몰되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이 책은 빨리 읽고 친구에게 돌려주어야 하니까, 그런 의무감이라도 가지고 읽어보자. 정말 천천히, 차분하게 읽어나가다가 김진아 님이 대구사람인걸 알아버렸다. 갑자기 동질감이 막 느껴지면서, 흥분하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서울 사람이라 생각했던 김진아 대표님이 사실은 대구사람이라니!! 이거 좀 기뻐서 울프 갔을 때 저도 대구에서 왔다며 엄청 친한 척을 해버렸지. 다 받아주신 울프 대표님! (+ 서울시장 후보님)

 

 

 

나도 외모를 꾸미던 때가 있었다. 내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는 많이 신경쓰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건 내가 손으로 뭘 잘 못하니 남들처럼 하려면 몇배는 더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못했던 것 같고. 어쨌든 내가 조금이라도 외모에 신경을 쓰고 나가는 날이면 다들 그렇게 외모에 대해 말하기 바빴다. 맨얼굴로 나간 날에는 어김없이 '꾸미면 남자들이 좋아할 텐데'라는 말도 들었다. 내가 남자들에게 선택받기 위해 꾸며야 했던 것일까. 

 

 

 

내가 파이책에서 가장 오랜 생각을 하며 머물렀던 부분이 바로 여기, 여성의 여성 혐오 부분이었는데, 나도 여성 혐오가 심했던 사람 중에 하나다. 사회적인 프레임을 쓰고 작은 파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서로를 혐오했던 건가. 확실히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내 안에 있던 여성 혐오에 대해 오래 생각을 했고, 여성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이 사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명예남성이 되어야 했을지 모르는 수많은 여성들이 그저 여성으로서 자신의 일을 하면 안 되었던 것일까. 나조차도 여자보다는 남자와 잘 맞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고 반대로 명예남성에게 치여본 일도 있었다. 그때는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싸워야 되면 싸워야지. 하지만 그 싸움의 대상이 잘못된 거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기질. 이 부분을 보는데 한참을 다음으로 못 넘어갔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여자, 할 말을 하는 여자, 자신에게 위협이 될 것 같은 여자. 지금껏 사회생활을 하면서 회사에서뿐만 아니라 파트타임 일을 할 때에도, 남자들은 '고분고분'하기를 강요했다. 업무상 알게 됐지만 개인적인 만남을 원했던 협력업체 차장도, 일을 좀 더 하기 쉽게 바꿔보자던 나의 제안에 해고를 말했던 편의점 사장도, '사무실의 꽃'이 되라고 했던 건설현장 소장도, 모두 그랬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어울렸으면 됐을걸, 나도 참~ 나라서 참지 않고 다 말해버린 결과로 퇴사를 하게 되었지만, 나에게는 어떤 사명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불합리한 것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내 뒤에 있는 여자들이 나와 같은 일을 계속 겪게 될 거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때 내가 퇴사가 아니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차피 참고 버텼어도 여성이 어떤 위치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던 곳들이긴 했지만 적어도 내 발언권이 조금은 더 생긴 다음에 싸웠어야 했을까 하는 미련은 조금 있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송은이, 김숙 언니들이 언급되어서 찍어보았는데, 땡땡이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비밀보장 탄생 에피소드가 나왔다. 매번 언급될 때마다 열 받고 언급될 때마다 통쾌하다. 

 

 

 

능력 있는 여성을 깎아내리는 하찮은 수식어들. 그렇게 여성들은 평가절하되어 자꾸만 뒤로 가고 있었다. 내가 '사무실의 꽃'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못했을 때에 숙이언니 이야기가 자꾸 생각이 났다. 나도 언니들처럼 새로운 컨텐츠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하나? 하필 코로나 발생과 동시에 백수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정말 하루 종일 누워서 생각만 한 적도 있었다. 구인을 하고 있지도 않은 비보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물론 '지금은 채용계획이 없다'는 회신도 받았다. 기뻤다. 안될 것 같으면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는 내가 비보에 자소서를 보내고 회신을 받았다. 

 

 

 

여성에게도 정치가 필요하다. 여자는 정치하는거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자란 내가 갑자기 정치 얘기를 하자니 어렵다. 너무 어렵다. 하지만 꼭 정치를 해야 한다면 '내 정치색은 여성이다'라던 어느 팔로워의 말을 빌어 정치에 쓰윽 발을 들이겠다. 나는 정당 활동은 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여성을 위해 내놓는 이슈에 대해서는 응원하고 지지한다. 나도 여성들과 함께 스스로의 기회를 만드는 활동을 하고 싶다. 30년을 무기력하게 살다가 갑자기 뭘 하려니까 잘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해보고 싶다. 

 

 

 

아니, 나 울프 갔을 때 버터크림헤븐라떼는 맛을 봤는데 키라임파이는 몰랐어!! 몰랐다고!! 이 책 울프 갔다 와서 다 읽었단 말이야ㅋㅋㅋㅋㅋ (어째 글이 점점 안드로메다로 가는디! 얼쑤!) 어쨌든 다음에는 울프 가면 울프소셜클럽만의 키라임파이를 꼭 먹고 말 거야.. 어쩔 수 없는 의식의 흐름대로 간다...

 

 

 

마지막으로 이민경 작가님의 추천사까지 다 읽고 나니 왜 다들 김진아 김진아 하는지 조금은 알겠고 왜 다들 이민경 이민경 하는지도 알겠다.(ㅋㅋ) 이민경 작가님도 이름만 알고 별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는데 이제 조금씩 가져볼라고요. 여자들에게 김진아와 이민경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가는 시간.

 

 

 

다시 한번 읽고 싶은 부분들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해가며 읽었는데 희한하게 친구가 줄 그어둔 부분이랑은 하나도 안 겹쳤다. 웃겼다. 다소 차이는 있으나 성격도 비슷하고 스탠스도 비슷하게 가는 친구인데, 같은 책을 읽어도 읽는 사람에 따라 포인트가 이렇게 다르다. 물론 나는 원래 책을 잘 읽지 않고, 읽고 싶어서 사둔 책도 거의 방치하기 때문에 이렇게 완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참 자랑스럽다. 다음에는 무슨 책을 읽을까. 이제 용기를 내어 '김지은입니다'를 읽을 차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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